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연합군에 의한 독일 점령 기간의 강간 (문단 편집) == 소련군 == 소련군 병사에게 강간당한 독일 여성의 수는 200만 명을 상회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대부분 피해 여성들은 한 차례만 강간당한 것이 아니라 여러 번에 걸쳐 윤간당했으며 많은 경우 60~70회에 이르는 강간을 당하기도 했다. 피해 여성의 나이는 8세에서 80세였으며 강간 피해자 중 관련 사망자는 24만 명으로 추산된다. 베를린의 경우 강간 피해자 10%가 강간에 의한 내상 혹은 소련군에 의한 살인으로 희생되었고 생존자 20%는 [[원하지 않는 임신]]을 하여(11,560건) 이 가운데 90%의 여성들이 [[낙태]]를 택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전체 신생아 가운데 5%가 러시아인에 의해 강간당해 출산한 사례였는데(1,156명) 피해자 200만명의 추산통계는 상기된 숫자들과 비가임 여성(월경을 하지 않는 유년기 소녀들과 갱년기 여인들)의 강간 통계들을 합산 및 역산한 후 전체 독일에 소급적용하여 산출된 수치다. 초기에 소련군은 강간에 대한 엄벌은커녕 강간을 방임하였다가, 그로 인한 문제가 계속 발생하고 통제가 안 되기 시작하자 뒤늦게나마 보복성 [[전쟁범죄]] 단속을 시작해 엄벌했으며 장교나 정치장교들이 해당 현장을 목격했을 경우 구두 경고 없이 바로 권총을 꺼내들어 가해 병사를 즉결 총살하기도 했다.[* https://www.theguardian.com/books/2002/may/01/news.features11] 피해자가 1만 명대일 경우는 적당히 하라는 구두경고가 고작이었으나 비공식 집계만으로도 1백만 명 이상이 약탈당하자 그제서야 불명예 제대와 수용소행, 총살형으로 경고하기 시작했고 이미 상당한 피해와 다수의 사망자들이 발생한 뒤였다. 하필이면 유복한 베를린의 가정에 술을 보관한다는 소문이 퍼져 오랜만에 이 약탈한 술들을 마시고 거나하게 정신줄을 놓은 다음 날에야 광란을 벌였음을 알게 된 일도 많았으며 소련 군장성들은 이에 인도주의 차원이 아니라 소련 포로들과 등가교환할 점령국 시민들을 죽여선 안 된다는 이유로 소련 여군들을 차출해 베를린의 성범죄 피해자를 진료하게 했다. 창작물에 등장한 사례로는 [[솔제니친]]의 자전적 소설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에서의 하루>에서 언급된 독일 여성을 강간하고 [[굴라크]]에 끌려온 소련군 병사 두 명의 사례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논픽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에서는 언급된 약탈과 성폭행을 저지른 사람이 총살된 사례가 대표적이다. 후자의 경우 강간을 당하고 크게 다친 베를린 여성은 자신을 치료해 준 소련군 소녀병사 출신 간호장교에게 군법에 의해 가해자를 총살할 것이니 혐의자들을 지목하라는 요구를 받고 눈 앞에서 더 이상의 피를 보는 것이 두렵다며 지목을 포기해 처형되지 않았다. 이 간호병사는 훗날 알렉시예비치에게 이 일화를 말하면서 도무지 이해가 가진 않지만, 이것이 바로 전쟁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라고 말한다. 해당 피해여성은 치료를 받고 회복하라는 의미로 큰 빵을 한 덩이 받고 떠난 후 행방에 대해 알려지지 않는다. 처음에는 동포들을 죽인 나치에 대한 반감에 기계적으로 환자를 치료했다는 소련 의사들과 간호병들에 따르면 그들이 베를린을 탈환한 후엔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소련군에 의한 강간 사건은 전적으로 [[독소전쟁]]에 대한 보복성을 띠고 있다. 독소전쟁은 알아도 이러한 사실은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인 것도 그런 이유이다. 당시 독일 역시 전쟁 동안 수많은 소련인 여성들을 강간하고 학살했으며 저지른 범죄가 너무 많다 보니 상대적으로 묻혀 버린 셈이다. 소련계 유대인이자 기관지 붉은 별의 칼럼니스트 일리야 예렌부르크는 이제부터 독일인은 어느 누구라도 사람으로 대우해선 안 된다는 내용의 선전물을 썼는데 베를린을 탈환한 소련군들은 당시의 자신들을 일컬어 그렇게 풍족한 삶을 살면서도 만족하지 않고 가난한 조국을 침략한 독일을 용서할 수 없어 그들의 인종청소에 버금가는 짓으로 복수할 각오 덕분에 살아 있었다고 말했으며 그들 중 일부는 익명으로 알렉시예비치에게 베를린의 아동과 청소년 강간까지 저지른 것을 후회한다고 고백했다. 한편 그러한 폭력적인 강간을 최소화하고자 장교 등의 고위 계급들을 만나 그들에게 몸을 의탁하는 여성들도 소수 존재했다. 극한 상황에서 물리력이나 권력이 있는 남성에게 의존하여 성범죄를 포함한 범죄를 피하려는 여성들의 사례는 자주 발견된다. 물론 이는 절대 비난받을 일이 아니며 남성들도 형태는 좀 달라도 비슷하다. 이를 '극단적'으로 확장하면 '여자는 인질이다' 같은 [[래디컬 페미니즘]] 책에서처럼 현대 사회에서도 모든 여성이 불특정 다수 남성들의 강간을 피하기 위해 한 남성에게 의존하게 되는 인질 및 [[스톡홀름 신드롬]]과 같은 처지에 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실화를 다룬 저서 베를린의 여인에는 미군의 포격을 머리에 맞는 것보다 뭐든 목숨을 부지하는 게 낫다고는 하면서도 자칫 진짜로 끔찍하게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윤간을 피하기 위해 소련군 장교의 현지처로 들어가 안전을 보장받는 독일 거주 여성의 이야기가 나온다. 노벨상 수상자 [[귄터 그라스]]도 어머니와 누이가 겪은 불행을 언급하였는데 어머니가 내 딸만은 건드리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면서 스스로 소련군에게 몸을 내주었으나 그들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음을 어른이 된 후에야 알게 되었다고 술회했다. 한편 그 와중에도 독일 여성 마르타 쿠르츠만의 회고에 따르면 최소한의 인간애와 천운으로 위기를 넘긴 순간도 있었다. 쿠르츠만과 여동생을 붙잡은 소련군은 이들이 막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는 중인 것을 알고 욕설을 퍼부으며 침을 뱉긴 했으나 순순히 놓아 주었다고 한다. 추가로 심지어 고층 건물 옥상으로 도망치니 다리가 아팠는지 추격을 포기한 그들을 피할 수 있었다거나 변소에 일부러 빠져 혐오스러운 몰골이 되고 흉측하게 분장하거나 가족을 닮았다는 이유로 화를 면한 사례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행운을 누린 여성은 드물었으며 당시에는 생존자들 사이에 '당했냐고 묻지 말라, 몇 명에게 몇십 번 당했냐고 묻는 것이 온당하다'는 식의 자조적인 자학유머까지 유행할 정도로 참혹한 지경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